【김헌식의 인문 특강】당진과 관계없는 안국사지 미륵불의 슬픔
- 서산시대
- 승인 2025.04.17 19:53
여미 석조여래삼존입상으로, 역사적 기록은 물론 지리적 문화권 개념에 접근해야

현재의 행정구역명 때문에 문화유산이 제대로 그 진면모를 알리지 못하는 일이 많다. 행정구역이 일방적으로 정해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이나 전통은 물론이고 지역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적 맥락을 무시한 채 이뤄져서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학술적 연구조차 엉뚱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보통의 외부 학자들이 지역에 거주하거나 지역적 맥락을 알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정미면 수당리의 석조여래삼존입상이다. 좀 딱딱할 수 있지만,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연원과 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디딤돌로 정미면 수당리의 공간적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석조여래삼존 입상을 어떤 이들이 세워 올렸을까를 생각할 수 있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고려사’ 918년 태조 원년의 기록에 “운주 등 10여 주현이 견훤(甄萱)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운주를 언급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927년 운주성(運州城)의 성주(城主) 긍준(兢俊, 생몰년 미상)은 고려의 태조 왕건(877~943)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운주가 고려의 영역이 될 수 있게 했다. 이 긍준(兢俊)이 태조 왕건 12번째 부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의 아버지 홍규(洪規)였다. 왕건이 지역의 호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때 성씨가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태조 왕건이 긍준에게 홍주 홍씨를 하사하고 이름까지 부여했다. ‘고려사 지리지 홍주조’에 따르면 운주는 1012년(현종 3년)에 홍주(洪州)로 바뀌어 등장한다. 3군(郡)과 11현(縣)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3군(郡)은 혜성군(현 당진 면천면), 대흥군(현 예산 대흥면), 결성군(현 홍성 결성면)이며, 11현(縣)은 여미현(餘美縣), 정해현(貞海縣), 당진현(唐津縣) 고구현(高丘縣) 등이 속해 있었다. 고구현은 지금의 홍성 갈산 서산 고북 일대이며,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던 여미현(餘美縣)은 운산면 일부, 정미면, 대호지면에 해당한다. 정해현(餘美縣)은 지금의 해미읍, 고북면 그리고 운산면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 해안 방어의 중요성 때문에 조정에서는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하게 되면서 정해현에서 해(海), 여미현에서 미(美)를 따서 해미(海美)를 이름 짓고 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한다. 따라서 대호지면 정미면, 운산면 등은 모두 해미의 관할지역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에 비추어 보면 정미면 수당리에 있는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당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홍주 면천, 조선시대에는 해미의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에 속했는데,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757년)은 여촌현을 여읍현(餘邑縣)으로 바꾼다. 이때 벌수지현도 당진현으로 바뀐다. 벌수지현과 여촌현은 분명 다르기에 정미면도 당진현에 속할 수 없었다. 즉, 통일신라 때도 여읍현은 당진과는 관계가 없었다. 요컨대, 백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진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고려시대에 당진현은 정미면이 속했던 여미현과 같은 홍주의 속현이었다. 즉 여미현은 당진현과 같이 대등한 자치현이었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이 만들어지던 시대는 여미현과 당진현이 동등하게 자치 공동체를 독립적으로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국가문화유산청에서 지정한 공식 명칭은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唐津 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이다. 이를 따라 모든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언론매체나 서적, 학술논문도 마찬가지다. 행정구역명을 따를 때 당연해 보이는데 역사적 문화적 지역적 통합성 관점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학술적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당진이라는 지명 때문에 안국사지는 물론이고 석탑과 아울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당진이라는 지명에 갇히기 쉬웠기 때문이다. 안국사지 석탑과 석조여래삼존입상 여미현이라는 지명에서 바라봐야 한다. 정미면은 본래 염 솔 부곡이라 이름이 붙었던 지역이었고, 1914년에 그 이름이 바뀐다. 해미현의 옛 이름인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에서 정미(貞美)라는 두 글자를 따서 정미면(貞美面)으로 칭하고 당시 서산군에 속하게 했다. 해미현이 없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서 이러한 편입은 정미면의 역사적 연원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미가 서산에 속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957년 11월 6일 법령 제456호에 따라 당시 당진군에 편입시킨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서산 시내보다 당진읍에서 가깝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행정적 편의주의 때문에 정미면은 역사 문화적인 연원을 무시당하고 말았다. 안국사지를 창건하고 석탑을 올리고 석조여래삼존입상을 세운 사람들은 적어도 당진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매향비에 나와 있다. 매향을 한 지역도 당진 바다가 아니라 천의포 앞바다라든지 출포리 앞바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국사지의 위치가 곳은 가야산 상왕산의 범주에서 접근해야 맞다. 상왕산을 일각에서는 코끼리 뿔을 닮은 모양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상왕은 곧 부처를 뜻하며 상왕산은 부처의 모습을 닮은 산을 말한다. 상왕산에는 수많은 사찰과 서산마애삼존불의 입지를 생각할 때도 당연한 노릇이다. 다만 가야산의 국가 불교 보원사, 염솔 부곡의 안국사 석조여래삼존 민중 불교를 알 수 있다. 따로 당진이라는 현재의 행정구역명으로 석조여래삼존입상을 편입시키면 이런 전체적인 인식과 관점이 단절된다. 이런 지역의 역사적 공동체성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여미라는 관점에서 석조여래삼존입상을 바라봐야지 당진이라는 인식의 틀로 보면 곤란하다. 실제로 수당리와 서산 운산면 여미리는 바로 붙어 있다. 여미리에도 석조여래삼존입상을 연상할 수 있는 미륵불이 있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해미성에는 사방비보(四方裨補) 미륵불도 있다.
당진읍 사람들도 정미면 수당리가 대대로 당진땅은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연원이나 전통성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라도 석탑과 입상을 만들었던 고려시대를 기준으로 여미 안국사지 석탑, 석조여래삼존입상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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