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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해미읍성을 서산읍성으로 바꾸랴...

by 신바각바 2025. 5. 9.

【김헌식의 인문 특강】해미읍성을 서산읍성으로 바꾸랴...

  •  서산시대
  •  승인 2025.03.06 18:30

 

전통 가치를 살리는 것이 브랜드 효과 크다

김헌식 중원대학교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행정구역 제도가 달라졌어도 해미읍성을 서산 읍성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현재 해미(海美)가 서산시의 하위 지자체라고 해서 서산 읍성으로 통합 브랜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미읍성은 고유한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브랜드 가치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면천 읍성을 당진 읍성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산항의 명칭 변경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통합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고 행정 효과는 떨어질 수 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의 통폐합의 사례는 참고해야 할 반면교사의 사례다. 당시 온양시 의회와 아산 군의회 투표가 이뤄졌는데 군의원이 많던 아산군이 온양시를 통합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사실상 아산과 온양의 다른 지역이었고 대중적 인지도가 온양이 높았는데도 말이다. 본래 아산군의 중심지는 곡교천 북쪽 영인면이었는데 구체적으로 그곳에 아산리가 있었고, 곡교천의 남쪽에 온양시가 있었다. 아산리가 조선 시대 영인현에 속했다면 온양시와 배방, 탕정 등은 본래 온양현에 속했다. 전통적으로 온양현이 아산현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온양은 말 그대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역대 왕들이 행차하여 머물며 이용하던 온궁(溫宮)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온양 온천을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는 신혼여행지로 주목받았던 때가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온양까지 전철이 놓이면서 서울에서 많은 시니어가 방문했던 이유다. 온양이라고 하면 더 알아듣지만, 아산은 어디인지 몰랐다. 원래 아산은 영인면의 아산리였으니 그럴만했다. 아직도 아산의 중심지는 옛 온양시의 도심이며 전철 역도 아산역이 아니라 온양온천역이다.

 

이런 비극의 시작은 일제 잔재 때문이었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통합하면서 신창군, 온양군, 아산군을 통합하면서 아산군보다 큰 온양군을 아산군의 하위로 두어 온양면으로 삼았다. 이유는 청일전쟁 당시 아산만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아산리를 아산군으로 키운 일제의 사특한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온양시의 인지와 규모를 강해져 1986년 온양시가 되었지만, 1995년 반강제로 아산시에 통합된 것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온양시를 돌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일제의 의도 때문에 부각된 아산이 전통의 온양까지 집어삼켰지만, 민중은 아직도 온양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대산항의 평신진은 1895년 을미 개혁 때 폐진이 되었고 일도면과 이도면으로 서산에 복속시키는데 이 을미개혁은 일제가 일으킨 명성 왕후 시해 사건 뒤에 이뤄졌다. 일제를 등에 업고 이뤄져 비주체적이고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개혁을 했다. 그나마 그 뒤에 대산면을 찾은 것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대산포(大山浦)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 많은 문헌이나 지도에 등장하지만, 서산포(瑞山浦)라는 지명은 없다. 이보다 작은 개념인 서산진(瑞山津)이라는 명칭도 확인할 수 없다. ()은 나루터를 뜻하는데 나루터보다 더 크다면 포()라고 한다. 대산이라는 지명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설령 대산이라는 지명은 많겠지만, 대산포나 대산 곶은 물론 대산항은 없다. 오로지 대산항만 있으니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다른 사례로 당진항이나 평택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두 곳을 들어 서산 항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곳은 항구에 대해 더 연원이 밀접하다. 얼핏 당진(唐津)은 대산포(大山浦)보다 작은 나루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진에는 고대면의 당진포(唐津浦)가 있다. 당진시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당진포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당진포리와 그곳에 있는 당진포 진성(鎭城) 터가 이를 말해준다. 당진 시내 사람들조차 이를 잘 모르기는 하는데 당진포리는 대산항 옆의 삼길포에서 동쪽 맞은 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같은 대호만(평호만)에 위치하니 당나라(중국)로 가기 위해서는 같은 해로의 바다를 이용했다. 사실상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바다이다. 하지만, 대산포가 당진포보다 더 깊은 바다에 가까워 유리했다. 어쨌든 당진항은 이러한 점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을 갖는다. 더구나 당진항이 위치한 곳은 예로부터 대진(大津)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다른 말로 한진(漢津)이라고도 했다. ()나라로 가는 나루터라는 뜻을 지닌다. 이러한 연원들 때문에 평택항과 다툼이 있었다. 사실 평택항과 당진항도 정확한 이름은 아니다. 공식 명칭은 평택-당진항이기 때문이다.

 

사실 평택이라는 말도 물길과 연관이 있다. 평평할 평()에 못 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떤 이들은 평택을 못이 많은 고장이라고 하지만, 그 이름은 아산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지어졌다. 평택에는 큰 호수는 물론 큰 저수지도 없다. 대진이라는 명칭은 원래 당진과 평택을 아우르는 아산만 전체를 일컬었다. 더구나 평택은 구한말까지 충청도에 속해 해미 호서 좌영의 관할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아산만은 잔잔한 호수나 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임하필기 13권에는 우리나라 12강의 근원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 아산만이 나온다. “셋째는 대진(大津)인데 그 근원이 셋으로, 하나는 양지(陽智, 현 경기 용인 지역)의 곡돈현(曲頓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청양(靑陽)의 백월산(白月山)에서 시작하며 하나는 공주의 차령(車嶺)에서 발원된다.” 조상들은 예로부터 아산만을 대진이라고 했다. 대진에 작은 강들이 최종 모이는 곳이니 한강처럼 유유히 있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곳은 남해와 동해와 같이 넘실대는 파도가 없이 언제나 잔잔하니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오가기 좋은 곳이다. 큰 호수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서산은 호수 같은 바다나 포구나 나루와 연관성이 없다. 상서로운 산의 고장이라는 이름이 정체성이다. 물론 이는 가야산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옛 이름 서령(瑞寧)에서  어질다, 인자하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성어와 밀접하다. 다만, 서산 갯마을이 정체성과 정통성, 브랜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갯벌을 간과하고 무시한 결과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호만, 천수만이 대표적이고 가로림만은 점박이물범 덕에 간신히 지켜낸 수준이다. 서산 갯마을 정체성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했는데도 말이다. 이미 형성된 서산 꽃게의 상표 가치조차 살리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평택항-당진항은 원래 포()가 아니라 그보다 작은 진()에 불과했다. 대산항은 대산진(大山津)이 아닌 더 큰 대산포(大山浦)의 역사 속에 이어져 왔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국가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본격적으로 브랜드가치를 축적해 왔다. 이러한 역사성은 이미 브랜드가치를 형성해 왔는데 이를 부정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 낭비일 수 있다. 대산읍이 서산시의 하위 지자체라고 해서 무조건 통합해야 한다는 논리는 지방자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의 트렌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섣부른 트렌드 쫓기로 많은 역사 문화는 물론 생태자원을 잃은 우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