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 서산 사람들이었다..

신바각바 2025. 5. 9. 12:46

【김헌식의 인문 특강】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 서산 사람들이었다..

  •  서산시대
  •  승인 2025.04.10 19:28

4.4 독립 만세운동은 서산의 독립운동사로 같이 품어야

김헌식 중원대학교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지난 4 4, 대호지 천의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있었다. 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은 대호지 조금리에서 시작해 천의장 터에 이르러 정점을 이뤘다. 해마다 치러 오는 행사인데 매번 아쉬움이 있었다. 서산에서는 이 행사에 관해서 관심이 없거나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 제도의 변화가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원래 대호지 조금리나 정미면 천의포는 모두 해미 나아가 서산에 속했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해미에 들어 있었다. 본디 대호지면의 이름은 서면(西面)인데 이런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해미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 4 1일 행정 통폐합에 따라 해미에 속했던 서면은 해미가 서산군에 병합됨에 따라 대호지면으로 이름이 바뀐 채 같이 서산군에 들어간다. 대호지면이라는 단어는 조선이나 대한제국 시기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신생 명칭일 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제 잔재일 수도 있다. 4.4 독립 만세운동은 이런 행정 통폐합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1919년에 일어난다. 더욱 안타깝게도 1957년 대호지면과 정미면은 당진군에 편입되고 만다.

 

하지만, 4.4 독립 만세운동은 서산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는 실제로 주도했던 인물들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대호지면 면서기 민재기의 판결문을 보면 당시 만세운동을 기획할 때 면사무소 직원 김동운이 현재 각 지방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있음에 서산군에서 부르지 않음은 다른 지방에 부끄러운 일이니, 우리도 고창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명확하게 서산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수백 년 동안 해미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주민의 구성원들을 볼 때 대산면과 지곡면 지역과 많이 오갔으면 친척들이 많이 서로 거주한다. 대호지-천의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서산소속 순사들이 출동해 진압하려 했다.

 

면사무소 직원의 발언에서 더 나아가 잘 못 알려진 주체의 의미와 가치도 생각해야 한다. 일부 연구에서는 대호지 유림과 집성촌이 주도했다고 하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민관 합동 독립 만세운동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특히, 면사무소 소사였던 송재만이 가장 긴 5년의 옥고를 치렀던 점도 봐야 한다. 이런 긴 옥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기 드문 군중의 동원이었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모아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면사무소 직원들의 행정적인 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호지면 조금리에 있던 면사무소 직원 강태원, 김동운, 민재봉, 송재만이 1919 3 26일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한다. 그 뒤에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민재봉·남흥열·강태원 3인이 대표자를 물색하던 가운데, 인물과 재정 면에서 남주원을 대표로 선임했다고 한다. (박걸순, 한국근현대사연구, 2018) 무엇보다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들은 3 27일에 도로수선을 명목으로 한 집 당 한 사람씩 4 4일 오전 8시 면사무소에 나오게 했다. 공식적인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도 통제할 수 없었다. 일종의 마을 부역을 위해서 차출한 것인데 400여 명이 모였고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부르게 하고 사람들을 인솔해서 천의 장터에 이르게 했다. 무려 7km에 이르는 행진이자 가두 시위였다. 4 4일을 선택한 것은 그날이 장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인정 면장의 허락과 공개적인 만세 시위 독려가 주효했다. 의령 남씨를 중심으로 한 유림 인사들은 서울의 고종 인산일에 참여하고 마침 3.1만세 운동을 보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얻어온 것을 활용했다. 여기에는 서산 지역에서 독립 만세운동에 주도적이었던 천도교인들이 같이 참여했다. 앞서 서산 관내에서 그들이 만세 운동을 벌여 왔던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아울러 양반토호세력이 주도했다고 보는 논문이 있는데 토호라는 말 자체도 적절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다.

 

다른 하나는 대호지 천의 지역이 외지고 궁핍한 곳이었다는 편견이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지역을 잘 모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호지는 지리적 폐쇄성으로 인해 정치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소외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궁벽한 농촌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대호지 3.1운동의 전개와 특성,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2010) 혹은 바닷가 시골 벽지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라고도 한다. (박걸순, 한국근현대사연구, 2018) 사실 이런 논평들은 오늘날 나그네의 시선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대호지면사무소가 위치한 조금리에는 조금진(調琴津)이 있었다. ()은 포구를 의미한다. 포구를 통해서 서울 인천 수원 등지로 오갈 수 있었다. 선진 문물과 정보가 통하는 곳이었다. 의령 남씨 유림들이 서울을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사실을 일찍 인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1866 3월 독일의 상인 겸 학자 오페르트(Oppert,E.J.)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던 곳이 바로 조금리의 조금진이었다. 이곳 바닷가에서 호서 좌영 영장 겸 해미 현감 김응집 등이 직접 이들을 만났던 것은 서양 교류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다. 아울러 천의장터는 지역에서 태안장, 해미장과 함께 3대 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었다. 더구나 천의장을 통해 정해현과 여미현 등으로 나갈 수 있었던 요지이다. 궁벽하고 외진 곳으로 보는 이유는 1982년 대호만(평호만)이 방조제 공사로 막히면서 퇴락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물과 정보가 통하던 바닷길이 막혔기 때문이지만, 역사적 역원은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유림의 참여가 가능한 사회적 자본과 제도를 생각해야 한다. 즉 대대로 병마절도사영, 호서 좌영이 있던 해미에 속했기 때문에 유림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지역이다. 도호의숙의 존립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해서 잘못 간과하는 것에는 원래 예로부터 대호지면과 정미면이 당진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한다. 오랫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점도 있다.

 

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은 서산 지역의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뤄낸 위대한 독립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3명의 서산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198명이 체포되었으며 13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 등지에서 옥고를 치렀다. 무엇보다 참여자 대비 피체율 25%, 수형자는 16.3%에 이르며 전국 최고 수준이었고, 88명에게 태형 90도가 일괄 처분된 것은 전국에서 하나뿐인 예였다. 그만큼 희생이 컸던 독립운동 사례였다.

 

그런데도 잦은 행정구역의 변화로 간과되고 배제되어온 아픔과 상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서산에서도 대호지 천의 독립 만세운동 재현 행사 등에 같이 동참하고 공동 주관이나 주최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지역 독립운동사의 정신을 길이 오늘날에 이어받고 계승하는 출발이다. 대호지 천의 만세운동에서 서산인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