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왜 삼화목장을 밀가루산이라고 했을까?

신바각바 2025. 5. 9. 12:43

【김헌식의 인문 특강】왜 삼화목장을 밀가루산이라고 했을까?

  •  서산시대
  •  승인 2025.03.27 20:02

주민들의 공헌을 인정할 때  오히려 홍보 포인트

김헌식 중원대학교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서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삼화 목장은 독특한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인근 주민들은 삼화 목장을 밀가루산이라고 부른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 삼화목장은 밀가루산이라고 했는지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가운데 삼화 목장의 연원이나 특징을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정리할 때 삼화 목장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벚꽃이 장관인 곳이 삼화목장 즉, 서산 한우목장이다. 2024 12월에는 2.1 규모 데크길과 전망 공간도 생겼다. 전국적으로 알프스라는 명칭이 유행을 하면서 서산의 알프스길 개발 담론이 나올 만큼 풍광을 자랑하기도 한다. 일단 규모가 만만치 않다. 서산한우목장, 정확히 말하면 한우개량사업소는 운산면의 638만 평( 1,130) 크기의 목장인데, 여의도의 4배라고 알려져 있다. 대관령의 절반 크기라고는 하지만 산지에 대형 목장이 있는 것과 달리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강원도도 아니고 서해안 인근에 이른 목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잘 못 한다. 외지인들은 서해안고속도로를 가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펼쳐지는 목장에 감탄하고는 한다.

 

이곳의 모태는 삼화 목장이라는 것쯤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 시대 2인자 김종필 전 총리가 1969 1월 삼화축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척의 성과를 높이 평가받았는지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1975년에는 이인영 화가가 삼화 목장을 민족기록화로 남기기도 했다. 지금은 한우 종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음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한 마리당 20억 원에 이르는 토종 씨수소를 포함해 3천여 마리의 한우가 평화롭게 거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씨수소는 한국 소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전국에 좋은 한우 정자를 보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삼화 목장의 출발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점이 있다. 화려하게 꽃피는 계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어떻게 누가 만들었는지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삼화목장은 상왕산(307m)과 일락산(521m)의 서쪽 자락을 포함해 국유지에 들어섰고 명종 대왕 태실이 있는 봉우리까지 휘감고 있으니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저렴했던 시기를 생각하게 한다. 심지어 난데없이 강제로 그곳에 살던 일부 주민은 이주도 해야 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왔던 이들이었다. 김종필씨가 박정희 정부 시대의 2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또 있었다. 당시 삼화 목장은 야산을 개간한 것인데 이를 직접 누가 했는가는 잘 헤아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상적인 인부들을 고용해서 했는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목장 인근 주민들은 삼화 목장을 밀가루 산이라고 불렀다. 밀가루 산이라고 불린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바로 개간 노동하고, 밀가루 받는 산이었다. 요즘 같은 봄에는 먹을거리가 없는 게 시골 살림살이였다. 가을에 농사지어 수확한 식량이야 겨우내 먹고 봄에 이르러 끼니를 채울 게 없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 삐비나 쑥을 캐어 먹어야 했다. 이런 때 삼화 목장에는 개간 일이 있었다. 연장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쉽지 않은 노동이었다. 시골은 톱이나 곡괭이도 돌아가면서 쓰지 않았던가. 신발이 좋으랴 장갑이나 제대로 있으랴. 평지도 아니고 경사진 산에서 위험한 상황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힘겨운 노동의 대가로 삼화 목장은 주민들에게 밀가루를 주었다. 하지만, 하는 일에 비해서 그 양은 너무 적었다. 부당한 일이었지만, 당시 시골 사정에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굶는 자식들을 위해 부모들은 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밀가루는 김종필 씨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공법(PL) 480에 따라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 제공된 구호물자의 밀가루였다. 사람들은 그 밀가루를 ‘480 밀가루’, ‘악수표 밀가루라고 불렸다. 악수표 밀가루라고 부른 이유는 구호물자 밀가루 포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악수하는 두 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공법 480호는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으로 미국의 농산물 가격 유지를 위해서 만든 것인데 이 밀가루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밀 농사가 폭삭 망했다는 분석이 비등했다. 어쨌든 심화 목장 측은 한국 농가의 밀가루를 사서 준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짜로 받은 밀가루를 그것도 많이 준 것이 아니라 조금씩 주고 일은 시킨 것이었다. 손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선거 때마다 김종필 씨는 서산 지역에서 유권자의 표를 많이 받지 못했다. 다른 충청도 어느 지역보다 인기가 없었던 것은 이러한 아픈 밀가루 산의 상처가 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민들을 말을 종합해볼 때 김종필 별장과 인공 저수지 용비지(龍飛池)가 남아 있는데 이 저수지는 김종필 헬기가 올 때마다 물을 빼서 헬기 착륙장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의 이름다운 풍광과는 사뭇 다른 용도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저수지도 누가 만들었을지 생각해보면 그 가치를 새롭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지어 요약하면 삼화 목장은 서산 인근 지역 주민들이 맨손으로 개간해서 만든 것이다. 그것도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급했는지 의구심이 많다.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시 참여했던 지역 주민들의 이름을 돌비석에 새겨서 입구에 세워놓기라도 해야 한다. 그분들이 목장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공로를 기리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작업이 있을 때 서산 시민의 자긍심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벚꽃이 아름답게 핀 것은 마을 주민들의 손과 발이 있었기 때문이고 굶주림을 견딘 오랜 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을 민주 공화정 대한민국만이 인정할 수 있다.